나/일기
前 고려대학교 총장 김준엽 선생님 별세
PsychoMD
2011. 6. 9. 14:06
과거, 대학에서 선생님들과 술 자리를 하면서, 서울대 총장이 바뀔 때 이런 이야기가 오간 것을 기억합니다.
"사립대는 돈을 끌어와야 하는 자리니 그렇다치고, 국립대라면 그야말로 총장다운 총장을 세워야 하지 않나?"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을 키워내면서도, 국가로부터 별로 지원을 못 받는 사립대는 총장이 나서서 돈을 끌어와야 하는 구조입니다. 그렇다고 외국의 사립대학처럼 기여입학제도 허용하지 않고 있으니, 등록금에 크게 의존하고 기업에 손을 벌려야 합니다. 하긴 학생 등록금도 외국 대학에 비하면 여전히 싼 편입니다.
사립대 총장의 가장 큰 덕목은 바깥에서 돈을 끌어와 학교를 발전시키는 일이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금을 퍼붓는 만큼 좋은 대학이 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은, 최근 아시아권 1, 2위로 급부상한 홍콩의 대학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여, 지금도 사립대 총장 자리는, 지성의 사표라기보다는 바깥으로 돌며 돈 끌어들이는, 정치를 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인정하겠는데, 이기수 총장의 발언은 전후좌우 사정을 아무리 감안하더라도 고대 총장답지 않은 다소 '경솔'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 비판은 고대 졸업생들 사이에서 훨씬 더 강력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봅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도 연일 이야기 거리가 될 정도니까.
사립대 총장은 참 어려운 자리입니다. 특히, 고려대의 경우, 대학의 색깔이 유별나다 보니 처신에 큰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고대 총장이라는 자리가, 그렇다면 어떤 자리인가?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는 않지만 80년대 초반에 그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자리'라는 답을 쥐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잠깐 언급한 김준엽 총장 재직시에 대학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사립대 총장답게, 재직시절 돈을 끌어와 법대와 정경대 건물을뚝딱 지었습니다. 어느 교직원 출신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서, 월급을 동결해도 아무도 이의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 약속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일반 학생이었던 저는 김준엽 총장을 가까이에서 경험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과 관련하여 세 가지 강력한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그 기억에 따르면, 고려대 총장이라는 자리는 모름지기 이러해야 합니다.
김준엽 선생 : 1982~1985년 고려대 총장을 지냈다.
1983년 가을, 연세대와의 정기전이 갑자기 취소되었습니다. 연고전 혹은 고연전은 당시 가장 많은 학생을 '합법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대학행사였습니다. 학내에서는 십수명만 모여 스크럼을 짜도 경찰에게 단 2~3분만에 제압되곤 하는 그 시절, 수만명이 모여 학교 바깥 거리로 쏟아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행사였으니, 반정부 데모로 연결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그것을 학생들보다 더 잘 아는 전두환 정부는, 반정부 분위기가 절정에 오른 1983년 정기전을 취소하게 합니다. 지금은 믿을 수 없는 일이겠으나 당시 정부는, 못하는 게 없었습니다.
학생들의 반발은 당연히 심했습니다. 본관 앞에서 데모를 하다가(사복경찰(일명 짭새)이 교내에 있었어도 반정부 데모가 아니니 막지는 않았습니다), 급기야 학생회관으로 밀려들어가 철야농성에 돌입했습니다.
26년이나 지난 이야기이니, 쪽팔리지만 다 밝히자면, 저는 당시 가을 시화전을 준비하다가 술을 먹고 서클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어라?, 학생회관 출입문이 완전 봉쇄되어 있었습니다.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출입문을 봉쇄한 바리케이트는 실내에서 책상과 의자, 쓰레기통 등으로 학생들이 쌓아올린 것이었습니다. 불과 2주 전쯤에 서울대의 한 건물에서 농성 데모를 하다가 200여명이 줄줄이 달려간 것을 감안하여 철통같이 쌓아올렸습니다.
5백명 정도는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기차 놀이를 하는데, 1층부터 4층까지 계단으로 계속 이어졌으니까. 학생회관 내에서, 실외에서는 하지 못했던 반정부 구호도 감히 외쳐보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장기자랑도 하면서 밤을 지새웠습니다. 농민가와 해방가 들을 목이 터져라 부르기는 했지만(저는 실제로 목이 완전히 쉬어서 다음날 말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경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30분마다 한 번씩 학생회관 정면에 설치된 대형 확성기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농성을 해제하라"는 경찰의 협박이 아니라, 김준엽 총장의 목소리였습니다.
김준엽 총장은 30분마다 한번씩 똑같은 이야기를 짧게 했습니다.
"학생 제군들, 몸을 다치지 마라. 다치거나 아픈 학생이 있다면 바깥으로 내보내라. 지금 이곳에 앰뷸런스가 대기하고 있다."
농성을 풀라든가. 반정부 구호는 외치지 말라든가 하는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배고픔과 두려움에 떨던 우리는 김준엽 총장이 바깥에서 밤을 새워 경찰을 막아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준엽 총장이 안계셨더라면 경찰이 달려들어 바리케이트를 다 부수고 학생들을 모두 연행해갔을 것입니다. 그때 대한민국 경찰은 그 정도의 화력은 지녔었고, 그 화력을 고대 학생회관에 쏟아부어도 신문 1단 기사 정도로 처리될 때였습니다.
밤새 바깥에 앉아 학생들을 지키던 김준엽 총장이, 경찰과 어떻게 협상을 벌였는지 모르겠으나 다음날 오전 철야농성을 하던 우리는 무사히 빠져나왔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 최초로 무사히 끝난 철야농성이었습니다. 얼떨결에 철야농성에 참여했던 저는, 그때 하던 무용담을 얼떨결에 지금까지도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김준엽 총장 덕분입니다.
김준엽 총장은 1985년 2월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총장직에서 물러나 학교를 떠납니다. 전두환 정권이 학생운동의 방파제를 부수기로 작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1984년 가을에 부활한 총학생회를 궤멸시키기 위해 전두환 정권은 총학생회장 등을 제적시키라고 종용했으나 김준엽 총장은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대학들은 모두 고대의 눈치만 살폈습니다.
그러다가 학생을 자르지 않은 김준엽 총장이 잘렸고, 다른 대학 총장들은 자기 학생들을 잘랐습니다.
"총장님 물러나지 마시라"는 데모가 1985년 3월에 있었는데, 그렇게 큰 규모는 저로서도 처음 보았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학교의 모든 건물이 텅 비었고 수위실 강아지까지 주인 따라 데모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데모대는 교문을 밀고나가, 이른바 짱돌만으로 경찰을 학교 양 옆 2km까지는 밀어냈습니다. 친구 김훤주가 어디서 구한 야구 방망이를 들고, 마치 이순신이 지휘하는 것처럼 '독려'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세번째 기억은 1990년대 초반에 생긴 것입니다.
부산으로 출장을 가기 위해 오른 열차 안에서 김준엽 총장을 뵈었습니다. 인사를 드렸더니, 악수를 청하며 "자네는 학번이 어떻게 되는가?"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 학번이라면, 내가 총장 자리에서 물러나지 말라고 데모를 했겠군. 고맙네"라고 하셨습니다. "총장 물러나라는 데모는 무척 많았지. 그런데 물러나지 말라는 데모는 내가 처음이야"라며 무척 즐거워 하셨습니다.
김준엽 총장 이후 지금까지 어떤 분들이 어떻게 그 자리를 거쳐갔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김준엽 선생을 총장으로 '경험'한 당시의 학생들에게는 '대학 총장이란모름지기 이런 자리'라는 개념이 만들어져 있을 것입니다. 총장에서 물러난 이후, 국무총리로, 당 대표로 정치권에서 수없이 러브콜을 보냈는데도 거기에 한번도 응하지 않은 채 평생 곧은 학자로 살고 계십니다.
모름지기 고려대 총장 자리는 이러한 자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회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사회 분위기를 무시하는 자리가 아니라, 사회 분위기를 좋은 방향으로 곧게 리드하는 자리, 대학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도 어른으로서 존경을 받는 자리.
바로 그 자리에 있는 분이, 사회 분위기를 헤아리지 못하거나 알고도 무시하거나 하여 구설에 오른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참 곤혹스럽습니다.
-------------------------------------------------------------------------- 고파스 추게 펌
<속보> ‘마지막 광복군’ 김준엽 전 총장 별세
광복군 출신으로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 고려대 사회과학원 이사장(고대교우회 고문)이 7일 오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1세.
고인은 1920년 평안북도 강계읍에서 태어나 40년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대 동양사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2학년이던 44년 일본군에 징집돼 중국으로 파병됐으나 탈출해 충칭 임시정부로 가 광복군에 합류했다. 그는 ‘역사의 신’이라는 저서에서 “중국 유격대에서 일본군과 싸우며 충칭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까지 6000리를 장정(長征)하는 동안 너무 고생스러워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고 수없이 절규했다”고 회고했다.
김 이사장은 광복 이후 46년 난징 중국국립동방어문전문학교 전임강사로 교육계에 발을 디뎠고 49년 귀국해 고려대 조교수가 됐다. 58∼82년 사학과 교수로 중국 근대사를 가르쳤다. 아세아문제연구소장을 거쳐 82년 총장에 취임했으나 전두환 정권의 압력으로 85년 사임했다.
총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학문 외길을 걸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총리 등 고위직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본분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중국 주요 대학에서 객원교수, 명예교수를 지낸 김 이사장은 중국에 한국학 연구의 싹을 틔우는 업적도 남겼다. 중국 대학 여러 곳에 한국학연구소를 세우는 등 한국학 진흥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9년 한국국제교류재단 특별공로상을 받았다.
김 이사장은 60, 70년대 유엔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으며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 독립운동유공표창, 건국포장, 건국훈장을 받았다. 저서로는 ‘중국공산당사’ ‘중국최근세사’ ‘한국공산주의운동연구사’ ‘나와 중국’ ‘회고록 장정(長征)’ 등이 있다.
고인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다. 장례는 고인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유족으로는 부인 민영주씨와 아들 홍규씨가 있다. 빈소는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 301호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0일 오전 9시다.
아래 기사는 고대 개교 100주년을 맞아, 고대교우회보에서 우리 시대 최고의 자이언트, 김 전 총장님을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독자 제현들에게 참고하시라는 의미로 다시 싣습니다.
존경하는 김준엽 선생님의 명복을 삼가 빕니다!!!!!
[특별초대석] 김준엽 前 고대 총장
“지조란 순일한 정신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고귀한 투쟁이다”
[교우회소식] 2005-05-30
▲필자가 처음 金俊燁선생을 지근거리에서 뵙게 된 것은 고대신문 학생기자 시절인 87년 명륜동 자택으로 찾아가 신년 인터뷰를 했던 때였다. 여러 번 고사했으나 당시 고대신문 주간이던 오탁번 교수가 책임을 지기로 하고 겨우 허락을 얻었던 걸로 기억한다. 85년초에 전두환 정권에 의해 고대총장직에서 타의로 사퇴하고 난 연후라 그의 한마디가 모교에 부담을 줄까 우려하여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어쨌든 당시 기사에서 나는 조지훈 선생의 말을 인용해 그에 대한 나의 존경의 념을 토로한 적이 있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는 지훈선생의 지조론은 이 노선비에게 한치 차이 없이 들어 맞는 것 같았다”라고… 영광스럽게도 그는 필자의 이 기사를 그의 저서인 『長征』에 등재해 주었다.
▲언젠가 오탁번 시인은 김준엽 선생을 가리켜,‘사람의 일생을 A에서 B까지의 선분으로 비유한다면 평생동안 그 선분의 오차범위 안에서 지조를 지키며 초지일관하고 있는 삶’이라고 찬사를 보낸 적이 있다. 필자 역시‘그냥 걸어온 족적이 그 자체로 역사가 되는 그의 삶’에 경외감을 갖고 있으며 그 당시 “아! 이런 분을 바로 자이안트(巨人)라고 하는거구나”하고 감탄한 기억이 난다. (어쨌든 그 이후로 그는 언제나 ‘나의 총장님’이시다.)
▲이번에도 인터뷰를 고사하시는 걸, 고대가 문을 연지 100년이 되었는데 한 말씀 해주셔야 되지 않겠냐고 몇 번을 졸라 겨우 승낙을 받았다. 현 정치나 시국문제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는 조건부 승낙이다. 성북동에 소재한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사회과학원으로 사진기자와 함께 찾아뵈었다.
“마음 속 깊이 존경하옵는 선생님을 다시 인터뷰에 모시게 되어 무상의 영광”이라며 인사를 올리자,“그래 정말 오랜 만 일세, 한 20년 정도 되었지”하며 반갑게 맞아준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두꺼운 검정 뿔테 안경에 활짝 웃는 모습은, 올해 여든 다섯의 연세가 믿기지 않을만큼 무척 정정해 보였다.
▲워낙에 건강해 보여서 건강의 비결은 뭐냐고 묻자, 사람들마다 묻는 말이라며 웃으신다.“무엇보다 규칙적인 생활이 중요해요. 밥 세끼 가리지 않고 제 시간에 먹고, 잠도 열심히 자고. 담배도 맘놓고 피지. 보시다시피 지금도 피잖아. 끊을려고 7번이나 시도 했지만 실패야. 7전8기로 핀다니까. 허허. 술도 양은 적어도 마시는 편이고. 특별히 하는 운동도 없는데 아마 유격대 시절 유격훈련을 톡톡히 받고 공동묘지에서 돌베개로 잠들고 했던 게 도움이 되나봐.
둘째로 마음이 편해야지. 누구나 하는 얘기지만 마음이 어떻게해야 편해지는가? 盡人事待天命이라했죠?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하늘에 맡겨야지. 예를 들어 전두환이가 나를 고대총장직에서 쫓아냈을 때도 나는 좌절하지 않았어요. 나는 역사의 神을 믿거든. 역사에 대한 신뢰. 정의와 선 그리고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걸 믿었던거죠. 나 쫓겨나고 전두환 정권 1년만에 망했어요. 하하하”
“아 그리고 내가 아침 공복에 냉수는 꼭 마셔요. 옛날 중국에 있을때 신장결석이 있었는데, 당시 병원에 전기가 없어 손전등을 켜고 수술을 받았던 적이 있죠. 그 이후로는 꼭 기상하자마자 냉수를 마시게 되었지”
▲참 얼마전에 중국의 계선림(季羨林)선생이 쓴 문화대혁명 시절을 회고하는 지식인의 체험담인『우붕잡억』을 읽었는데, 선생님 저서인 『長征』에 계선림 선생과 찍은 사진이 있는 걸 최근 발견하고 선생님의 교유범위에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季선생이 나보다 10살 위니 95세야. 중국에서 제일 존경받는 훌륭한 학자지. 세계 4대 학자중의 한사람이야. 북경대 교수로 있는 내 제자 양통방 교수를 통해 알게 되었어요. 지금도 새벽 4시에 일어나 연구를 하시는데, 나도 10시에 자고 4시에 일어나 공부를 하지”
▲고대에서만 만 36년간을 보낸 고대의 산 역사인 그가 고대를 떠난지도 벌써 20년이나 되었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을까?
“참으로 바쁜 생활의 연속이었지.기본적으로야 학자적인 생활의 연장이었지만. 책도 계속 내고, 여기 저기 강연이나 집필로 보낸거야. 관직은 아니 맡고 사회과학원을 세워서 지금까지 서재를 떠나지 않고 있지”
주지하다시피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중국 전문가, 공산권 및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전문가로서 20권의 저서와 30권의 편찬서등을 낸 바 있으며, 그의 많은 노작들이 ‘현대 명저100권’‘21세기에 남을 고전’등의 찬사를 받은 바 있다.
“최근에는 주로 한중관계의 연구에 집중하고 있어요. 49년 2월 처음 중국에서 귀국한 이래 39년만인 지난 88년 중국 땅을 밟은 이래 일년에 최소한 3~4차례는 중국에 가지요. 물론 내 전공이 중국사여서 자료수집차 가는 것도 있지만, 외국에서의 한국학 연구를 발전시키겠다는 신념 때문이지요.
내가 58년도에 하바드대학에 교환교수로 갔을 때인데,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거예요. 아 이래서는 안되겠다.우리나라는 우리가 알리지 않으면 안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던거지”
이것은 바로 그가 고대에 세계적인 연구소로 이름을 날리던 아시아문제연구소(이하 亞硏)를 세운 이유이기도 하다. 구미제국주의나 일제의 시각에서 벗어나 아시아 각국의 과거 현재 미래를 고찰하기 위한 우리나름의 견해를 정립해야한다는 그의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가 그렇게 애정을 갖고 키워놓은 아연이 옛날의 명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하자, “잘하고 있는 데 뭘”하며 말을 돌린다.
그는 아연이 성공하게된 비결을 이렇게 말한다.“첫째 연구소를 하는 목적이 분명했고, 둘째 연구소 책임자가 세계적인 시야를 가졌다는 것, 셋째 책임자가 모금능력이 있어야 된다는 것, 마지막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 분야 최고 전문가들이 모여야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유명한 그의 ‘거지론’를 들먹인다.“연구소를 경영하려면 무엇보다도 전문적인 연구인력과 연구시설이 있어야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연구비 즉 돈 문제요.
요즘은 더 그렇겠지만 모금(fund-raising)능력이 중요하지. 나는 아연소장시절이나 총장시절 연구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국내외로 동분서주하였는데, 아연시절은 ‘작은 거지’총장시절에는 ‘큰 거지’노릇했다고 농담을 하지요. 하하하” 요즘 대학가에서 대학 발전을 위한 모금과 기부문제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모금의 문제는 앞으로도 비중이 커지면 커졌지 작아지지는 않을 거라는 면에서, 또 다시 그의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미루어 짐작케한다.
요즘 천착하고 있는 韓中교류 사업 역시 그가 선구자임은 물론이다.
“광복되고 바로 귀국을 하지않고, 북경대 전신인 동방어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1948년에 제 1 회 졸업생 3명을 뽑아 한국유학을 시켰지요.서울대 역사과에서 이병도 선생 지도를 받게 했지요. 그 중 한사람이 바로 중국내 ‘한국학의 제1인자’인 북경대 양통방 교수야”
일제말기 학병으로 끌려가 장준하 선생과 함께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하여 重慶임시정부에서 이범석 장군의 부관을 지내며 항일독립투쟁을 벌였던 그의 이력이, 지금은 흔해진 한중 학생교류 사업을 정부에서조차 꿈도 꾸지 못할 50년전에 시작하게 만든 것이다.
한중수교 이후 그는 중국에서의 한국학 연구를 활성화 시킴과 아울러, 중국내에 흩어져 있는 우리 옛 문화와 독립운동의 흔적들을 복원하겠다는 구상을 했다.
“중국에 한국학 연구소가 설립될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 지금은 북경대, 상해복단대, 절강대, 산동대등 8개의 지역별 최고대학에 한국학연구소가 있을만큼 기초가 잡혔지요.
그리고 95년부터 2년에 한번 씩 한국전통문화 학술회의도 열고 있지”하면서“저 쪽 서가를 봐. 저게 다 그 성과물 들이야”하며 중국에서 나온 한국학 관련 수천권을 모아둔 서가를 가르킨다.
15년간 혼신의 노력을 했던 중국내 우리 문화유적 복원사업도 올 10월 절강성 항주시에 있는 高麗寺 복원으로 일단락된다. 또한 상해와 중경, 항주 등지에 흩어져 있던 임정청사의 복원사업과 윤봉길 의사기념비 확대사업도 거의 완료되었다.
모두가 길게는 몇 년씩 중국정부를 설득해야하는 등 공을 들인 일이다. 그 외 양주에 있는 최치원 기념비, 절강성의 최부 기념비,서안의 김가기 기념비, 영파 의통 기념비 건립등 중국내 역사나 문화재 관련 사업중에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사업이 없을 정도로 그는 여생의 힘을 중국문제에 쏟아붓고 있다. 무슨 연유일까?
“문화교류라는 게 수돗물 틀면 물이 쏟아지듯이 순간적으로 되는 게 아니야. 일본은 이런 일을 많이 하는데 우리 정부는 문화나 역사쪽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한중간의 교류 역사가 수천년인데도 중국내에 우리 문화의 흔적이 어딨는지 잘 몰라요. 연간 200만명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백두산이나 보고 돌아온대서야 말이 됩니까?”
▲올해가 2005년이니 나라가 광복된지 6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광복군 투사 출신의 학자로서 소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그래, 광복된 지 벌써 60년이 되었군. 나도 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했다가 살아 돌아 왔지만, 살아 돌아 올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항일독립투쟁을 한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일제통치하에 고생했던 것 늘 머릿속에 떠올라요.
실제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를거야”하며 잠시 말없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는다.
“광복후 새로운 나라가 들어설 때 이렇게 생각했어요. 먼저 남북을 통일해야 하는데 평화적인 통일이어야 한다. 둘째는 자유민주주의를 해야한다.
좌우를 막론하고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독재는 반대야. 셋째는 경제발전. 가난해서는 개인의 존엄과 민족의 존엄을 지킬수가 없거든.
넷째는 단절된 전통문화를 어떻게 복구 계승하며,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것인가하는 거지. 이들 모두는 계급이나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 전 국민이 잘 살수 있도록 하는 복지 위에서 가능한거지”
그는 이것이 우리 시대에 맡겨진 사명으로 광복후 50년안에 이뤄져야한다고 생각했다면서 지금 돌이켜 보면 어느 정도는 이뤄진 것 같다고 말한다.
“점수를 주자면 한 70점 정도 될까?”하면서도 광복 60년을 맞아 생각해보면 그래도 불안한 요인들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역시 첫째는 통일문제야. 북한의 핵무기 발전에 따른 불안이 남아있잖아. 둘째는 국제 정세의 불안이야.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의 우경화 군국주의화 흐름도 예의 주시해야하고, 중국 러시아와의 문제도 미리 미리 대비해야지요.
셋째는 경제불안이요. 우리가 그동안 상당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최근 많이 불안해졌어. 더 나아져야해요. 당장 많은 가게와 식당이 문을 닫고 있잖아”
▲말이 나온 김에 최근 우리 사회에 일고 있는 친일잔재 청산 작업에 대해 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요, 직접 항일독립투쟁에 참여한 광복군 투사 출신의 당대 최고 원로의 말이라면 가장 설득력이 있을 것 같아서다.
그는 먼저 그가 평소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말중의 하나인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한 구절을 직접 써준다.
“전사불망(前事不忘),후사지사(後事之師)” 역사를 잊지 않음으로써 미래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인 것 같다.
그는“안중근 의사가 투옥되어 있던 여순감옥에 가면 강택민 전 주석이 쓴 사마천의 글귀를 크게 비석으로 만들어 세워두었다”고 일러준다.
“해방후 가장 잘못한 일 중 하나가 친일파 정리를 못한 일이야. 제일 유감이 이승만 박사가 반민특위를 해체한거지. 역사인식이 제대로 없었던 탓이야.
오늘날 가치기준이 흔들린다, 도덕성이 타락했다고 말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때 나라와 민족을 팔아 먹었던 친일파를 그대로 두었기 때문이야”라고 말하면서 ‘썩은 사과론’을 펼친다.
“그러나 일제 35년간 직간접적으로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는 생존이 불가능했던 점을 감안해 처벌은 악질분자에 한해야해요. 물론 역사적 심판은 받아야겠지만 일일이 따지면 사람이 없어져요.
그 사람의 功過를 잘 따져서 총체적으로 봐야지. 썩은 사과가 있다고 해봐. 절반 이하가 썩었으면 도려내고 활용해야지.이건 남북통일이 됐을때도 마찬가지야.
이북에서는 거의 다가 공산당이었는데 이들을 공산당에 부역했다고 일률적으로 거부할거야?”
▲요즘 같은 변절의 시대에 평생을 志士적 지조를 굽히지 않고 살아온 그는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동시대인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무엇보다 실력을 갖추어야 하고 지조가 있어야 해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파악할줄 알아야하고,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이 대우받는 발전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지요.
민족주의가 나쁜 건 아니지만 국제화 시대에 너무 민족주의만 강하게 내세우면 배타주의로 흐르기 쉽지요. 그리고 국제정세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인 흐름을 파악하는데도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김준엽 선생은 1920년생이니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망국의 설움과 민족해방,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의 시대,그리고 연이어 이어진 6.25 와 4.19 그리고 5.16 등등 그야말로 격동의 한세기를 살고 있는 역사의 산 증인이다.
“보통 대가를 치른게 아니야. 그리고 이건 나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가 겪은거지.
그래도 목숨을 걸고 독립투쟁한 것은 잘한거라고 봐.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고대교수로 고대 총장으로서 제자와 국민들에게 자유, 정의, 진리를 얘기할수 있었겠어? ”하면서 “다만 사적인 내 일생은 무취미가 취미일 정도로 무미건조했던 것 같애. 골프 테니스 포카 화투 낚시 화투도 못해”라고 빙긋이 미소를 짓는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물론 사모님과 독립운동을 같이한 그야말로 ‘평생동지’이시긴해도,취미가 없는 걸로도 유명한데다 여러 가지 공사로 분망하셔서 사모님으로부터 후한 점수는 못받으실 것 같은데요.
“그래 우리 집사람하고 나는 진짜로 평생동지야. 그동안 내조하느라 고생 참 많이 했지. 76년도인가 박대통령 시절에 내가 통일원장관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어. 물론 나는 평생 관직을 맡지 않겠다는 굳건한 소신이 있었지만, 그런 속내를 밝히지 않고 집사람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일언지하에 맡지말라고 하더라고. 이심전심으로 통한다고 생각하니 더 고마웠지.허허”
夫唱婦隨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금도 그러한데 관존민비사상이 농후하던 30년 전이었으니, 소위 정경부인(?)을 희망하는 여느 마나님들 같았으면 남편보다 더 유난을 떨 법도 했는데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그는 국무총리직을 하도 많이 고사하여 한 때 “고사총리(固辭總理)”라는 별명으로도 불릴 정도로 학문 외길을 걷겠다는 학자적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부터 김대중 정권에 이르기까지 대사, 장관, 총리직을 포함하여 각종 굵직굵직한 요직중에 그가 제의를 받지 않은게 없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본군 학병으로 끌려갔다 제1호로 탈출하여 광복군 투사로서 독립운동을 한 이래,『사상계』에 참여하여 자유민권운동에 힘쓰고, 민족정기의 앙양과 남북통일을 위해 전심전력 했으며, 훌륭한 학자로, 뛰어난 교육자로, 전문 외교관을 무색케하는 민간외교관으로, 탁월한 경영자요 행정가로서의 삶을 살아온 그. 한두 마디 단어로는 결코 형용할수 없을 만큼 광대무변한 일생을 살아온 그는, 그가 종횡무진 누벼온 지워지지 않을 족적을 이미 역사속에 남겨놓고 있다.
“임시정부의 자주독립정신을 계승하고, 우리 민족의 자유정신과 민족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역사를 물려주자”고 강조한다.
“길에서 인사하는 고대교우들이 있으면 내가 몇 학번이냐고 물어봐. 내가 82년부터 85년사이에 총장직을 맡았는데 그때 시국시위가 많았고 내 총장사퇴와 관련해 고생한 학생이 많았는데 감사의 뜻을 전해지 못했거든 그래서 지금이라도 그말을 하려고”하며 호탕하게 웃는 김준엽 선생.
“내가 고대에서만 만 36년 있었지만 한번도 기분 나쁜 일이 없었어. 일생 잘한 선택중에 하나가 고대로 온거야. 우리 고대가 벌써 개교 100주년이라니 참으로 감개무량이구만. 우리 고대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잘 계승해서 세계적인 명문대학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시간동안의 긴 시간동안 유머를 섞어가며 시종 미소를 잃지 않고 인터뷰에 응해 주신 선생은 누군가의 말처럼 자랑스러운 고대인일 뿐만 아니라 고대가 자랑스러워 하는 우리 시대의 그레이트 자이안트이다. 선생의 무병장수를 간절히 소망한다.
<대담·정리 : 金鎭國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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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에는 독립군으로,
군사 독재 시절에는 교육자로서 시대의 스승이셨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런분을 몰랐다니..
고려대 출신 대통령도, 서울시장도, 국회의원도 모두 고대의 자랑이지만,
이런 분들도 그만큼 학교에서 많이 알리고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