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잉크

PILOT Iroshizuku Yuyake - 저녁노을, 그 이름 유야케

PsychoMD 2016. 10. 22. 15:43


철딱서니 없이 잉크만 이것저것 들이던 내가 가장 오래 사용했던, 나와 가장 오랜 기간을 함께한 잉크인 유야케에 대해서 조금 적어보고자 한다. 유야케를 쓰고 나서야 잉크 한병 비우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 데몬(아마 비스타였을 거다.)을 사고 나서 데몬에 어울리는 잉크를 찾던 중 발견했던 이 잉크. 원래는 은색 끈이 예쁘게 매어져 있는데 쓰다보니 잃어버렸다.. 이로시즈쿠 병 디자인의 절반을 잃었다 해도 과연이 아니다.

만년필 잉크들은 하나같이 센치한 이름들을 달고 있다. 만년필에 관심이 있는 정도의 사람이라면, 즉,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느낌과 감성을 자극받고 싶은 욕구가 충분한 사람이라면 잉크의 이름과 그 발색간의 연결고리를 상상으로 채워나가는 과정 까지도 큰 즐거움이라고 생각했는지 만년필을 모르는 사람에게 소개하기에는 약간 낯부끄러워지는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 "우와 이건 무슨 색 잉크야?" "어.. 어.... 저녁노을" "???") 모든 잉크를 사용해 본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스펙트럼의 잉크들을 출시하고 있는 제이허빈도, 잉크시장에 막 발을 내딛은 에고이스타도, 그리고 같은 회사에서 나온 이로시즈쿠들 중에서도 이만큼 그 이름에 공감가는 발색을 보여주는 잉크도 드물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라면국물색이라고도 하지만... 실제 사용했을 경우에 보이는 농담이 실제 저녁노을을 보는 듯한 아름다운 그라데이션을 보여준다.


뭉뚱그려 '주황색'이라는 색의 실사용에서의 애매한 포지션 때문에 사실 크게 기대하고 있지 않았는데, 유야케는 의외로 포인트 필기에도 루틴한 용도로도 굉장히 유용하게 쓰였다. 색 자체가 가지고 있는 시인성과 상대적으로 낮은 채도 덕분일 것이다. 잉크병을 저만큼 비울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유틸성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미트공부를 하던 시절 - 만년필 생활을 시작하던 시절 - 부터 많은 필기가 이 잉크로 쓰여졌다.



상:<몽블랑 골든 옐로우>, 하:<이로시즈쿠 유야케>


yuyake fuyu gaki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출처: http://farm5.static.flickr.com/4054/4398620942_b4f60c701a.jpg>


혹자는 유야케보다 후유가키를 선호하기도 한다. 유야케의 밍밍한 색감 보다 좀 더 강렬한 주홍색을 원한다면 후유가키도 충분히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유야케에서 조금 더 붉은 기를 제한 색을 원한다면 몽블랑의 골든 옐로우 또한 좋은 대안이다. 골든 옐로우는 지금 곰팡이 이슈 때문에 구입에 주의를 권하지만, 몽블랑에서 곰팡이의 발생을 조금 더 억제한 리뉴얼판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색감이 약간 달라졌다는 얘기도 있으니 참고 바란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골든옐로우도 지금 사용하기에는 비위상할 정도의 상태라서 이전에 적어둔 것으로 대체했다.



유야케의 또 다른 장점 중 하나는 데몬에 들어있을 때의 투명함 덕분에 굉장히 예쁘게 보인다는 점이다. 흔히 "고추기름"이라고도 말하는데, 구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마하트마 간디 다음으로 가장 예쁜 잉크 중 하나가 아닌가 한다. 이정도 투명함과 가독성을 모두 겸비한 잉크는.. 아마 흔치 않을 것이다.


만년필 생활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세상에 있는 수많은 만년필과 잉크들을 하나하나 경험해 보는 데에 있는 것 같다. 그런 다양한 경험들 속에서도 기억에 남는 경험이 하나 둘 생기기 마련인데, 유야케는 내게 그런 잉크였다. 저 병을 비운 뒤에도 아마, 또 다른 유야케가 내 펜을 채우고, 내 기억들을 채워갈 것 같다. :)